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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야기

빛과 예술의 도시, 파리의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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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유럽에서 2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영국 런던에 이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과 함께 유럽의 중요한 금융 허브이기도 합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파리는 예술과 패션의 도시로 불리며 루이뷔통,샤넬, 에르메스 등

유수의 명품 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파리

고대와 중세의 파리

 

고대 파리는 센 강 가운데 있는 시테섬의 촌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요새 도시로 발달하였고 989년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왕권을

잡고 카페 왕조의 시대가 열리면서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프랑스의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백년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혈전으로 큰 혼란에 빠졌고 잉글랜드 왕과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 파가 파리를 점령하게 됩니다. 잔 다르크는 이를 탈환하려다 붙잡혀

마녀재판으로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빛의 도시, 파리

 

파리의 별명 중 하나는 빛의 도시입니다. 이는 루이 14세 때 붙여진 별명으로

당시 범죄를 줄이고자 한밤 중에도 거리를 환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면서 루이 16세 때까지 정치의 중심은

베르사유로 옮겨갔습니다. 이 때문에 파리는 수도의 위상을 잃게 되고 프랑스혁명

전까지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파리에서 시작되었고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 일가가 튈리르 궁으로 끌려오면서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근대 파리의 시작

 

파리를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인물은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센 현의 지사였던

주르주 오스만 남작 입니다. 좁은 골목을 가로수가 놓인 넓은 도로로 개조하고 파리에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게 하는 등 사회 기반 시설들을 갖추게 하는 파리 개조 사업을 시행하였습니다.

2차 세계 대전과 파리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콜티츠 보병대장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콜티츠는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라며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이때 히틀러는 9번이나 전화를 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된 5월 혁명은 현대 프랑스 사회, 정치 및 교육 체계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다양한 예술의 세계적인 중심지임과 동시에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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