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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이야기

관측 천문학의 창시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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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으로 달과 목성 등을 관찰하고 역학 연구를 
통해 근대 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여 
교황청 종교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고,
350여 년이 지나 교황청에 의해 공식 복권 되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젊은 시절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 1642년) 156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사에서 7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인 15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으나

수학과 물리학에 더 흥미를 느꼈고 기하학에 심취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의학 공부를 포기한 그는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면서 1586년 발표한 논문 ’작은 천칭’ 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피사의 낙하 실험

1589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모교인 
피사 대학에서 수학 강사가 되는데 여기서

그는 유명한 피사의 사탑 낙하실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실제로 한 게 아니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한 실험은 고도의 사고실험 이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망원경

 

1609년 갈릴레오는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고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했습니다.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을 가지고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인류 최초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습니다.

 

 

이 발견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 관념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을 책으로 정리하여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헌정 하기도 하였습니다.
1616년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면서 그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지도, 가르치지도 말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종교재판

 

그 후 여러 해 동안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 후 갈릴레오는 ‘천문대화’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6개월 만에 발행이 금지 되었고 끝내 종교재판에 회부까지 됩니다.
1633년 로마 종교 재판소는 그에게 종신 가택 연금을 선고했으며 그의 저서들을 금지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642년 1월 8일에 피렌체 인근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집에서 사망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돼 지동설 포기를 
수락한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100년이 지난 뒤 작가가 지어낸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비록 자신이 한 말은 아닐지라도 그 말은 
그의 심정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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